열왕기하 9장 14-26절 “심판 이유를 듣자” / 찬25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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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심판 앞에서 요행을 바랄 수 없다
주제 - 심판 앞에서 요행을 바랄 수 없다
핵심 질문 - 더 늦기 전에 이제라도 멈추고 버리고 끊어야 할 죄악은 없는가?
1. 도입
하나님은 ‘피를 흘리는 땅은 ‘비를 얻지 못하는 땅’(겔 22:24)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에스겔 22:24 “인자야 너는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정결함을 얻지 못한 땅이요 진노의 날에 비를 얻지 못한 땅이로다 하라”
오늘 본문의 나봇의 땅이 바로 정결함을 얻지 못한 땅, 비를 얻지 못한 땅으로 그려집니다.
억울한 사람의 피가 흐르는 땅은 바로 왕상,21장의 사건을 담고 있습니다.
아합과 이세벨에 그들의 탐욕을 위하여 피를 흘린 그 밭이 바로 배경으로 그려집니다.
억울한 사람들의 피가 흐르는 땅,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학대하고,악을 행하고도 부끄러움이 없는 자들이 많은 땅은 저주 받은 땅이다.
그렇게 만든 주범과 공범들에게 심판이 집행된다.
2. 본문
반란의 시작_
열왕기하 9:14 “이에 님시의 손자 여호사밧의 아들 예후가 요람을 배반하였으니 곧 요람이 온 이스라엘과 더불어 아람의 왕 하사엘과 맞서서 길르앗 라못을 지키다가”
열왕기하 9:15 “아람의 왕 하사엘과 더불어 싸울 때에 아람(시리아) 사람에게 부상한 것을 치료하려 하여 이스르엘로 돌아왔던 때라 예후가 이르되 너희 뜻에 합당하거든 한 사람이라도 이 성에서 도망하여 이스르엘에 알리러 가지 못하게 하라 하니라”
예후는 함구령을 내리고 이스르엘에서 치료 중인 요람을 향해 진격한다. 요람에게 닥친 진짜 위기는 아람(시리아)의 칼이 아니라 예후의 칼이다.
아람 사람은 부상을 입혔지만 예후는 치명상을 입힌다. 다 심판 받을 때까지 칼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심판을 피할 수 있는 불신은 없다.
반란의 현장_
요람과 예후가 마주한 곳이 ‘나봇의 포도원’이다.
열왕기상 21:15 “이세벨이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다 함을 듣고 이세벨이 아합에게 이르되 일어나 그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돈으로 바꾸어 주기를 싫어하던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소서 나봇이 살아 있지 아니하고 죽었나이다”
왕과 반역자의 만남이지만 그곳에서 예후는 심판의 집행자가 되고, 요람은 범죄 현장에 소환된 죄 인이 된다.
열왕기하 9:22 “요람이 예후를 보고 이르되 예후야 평안하냐 하니 대답하되 네 어머니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가 이렇게 많으니 어찌 평안이 있으랴 하더라”
무고한 사람을 죽인 현장에서 아합 가문의 죗값을 치르게 한다.
열왕기하 9:25 “예후가 그의 장관 빗갈에게 이르되 그 시체를 가져다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밭에 던지라 네가 기억하려니와 이전에 너와 내가 함께 타고 그의 아버지 아합을 좇았을 때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그의 일을 예언하셨느니라”
25절은 이것은 여호와의 신탁을 성취합니다(열왕기상 21:19). 이 짐을 빗갈에게 지우셨다.
문자 그대로 "이 선언 또는 발언을 그에게 제기했습니다."
죄를 짓고도 무사한 삶은 지금까지로 족하지 않은가?
반란의 이유_
예후는 요람을 향해 반역 의도를 밝힌다.
오늘 본문은 사적 보복이 아니라 이세벨의 음행과 악행에 대한 심판이다.
‘평안’을 묻지만 정작 나봇과 나라의 ‘평안’을 짓밟고 파국으로 몰고 간
아합의 죄악에 대한 보응이다.
눈앞의 문제(불안)는근본적인 문제(불신과 불의)의 증상일 수있다.
3. 결론
예후의 반란을 통해 아합 가문을 향한 심판이 시작된다.
하나님은 죄를 묵과하지 않으신다. 심판은 철저할 것이다.
Lexham 성경사전 심판의 날
심판의 날 "주의 날" 또는 "야훼의 날"이라고도 한다. 주로 예언과 묵시 문헌에서 하나님이 사람들의 죄에 대해 적극적으로 심판하실 때로 예상한 날.
Lexham 성경사전 신약에서의 심판의 날
신약에서의 심판의 날
신약에서 심판의 날은 예수의 재림을 동반한다:
Lexham 성경사전 신약에서의 심판의 날
구약과 마찬가지로, 회개가 요구된다. 바울이 그의 독자들에게 이 날이 아직 오지 않았음을 확신시키며(살후 2:1–2), 오히려 베드로에 따르면, 그것이 사전에 발표된 이유는 청중이 자신들의 방식을 바꿀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벧후 3:11).
데살로니가후서 2:1–2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
베드로후서 3: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요한1서 4: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얼굴로 그 냉정한 얼굴을 가려선 안 된다.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그 사랑 안에서 심판날을 기다리며 사는 것, 이것이 성도의 본분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셔야 할 만큼 우리가 악하고 완고하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완고함, 완악함을 버리고/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흔들리지 않는 광명교회와 성도가 되기르 소망합니다.